오컬트 다큐멘터리
극 중 임시완은 묻지마 테러범이다. 영화에서 그의 테러 이유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하나의 재난처럼 다루어진다. 그 재난에 대처하는 게 영화의 핵심 내용이다.
재난에 대응하는 모든 이들은 '비행기가 착륙하면 바이러스가 퍼질 것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행동한다.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임시완을 보고 공포를 느낀 관객은 승객들의 입장에 이입해서 보다가, 이 신념이 나오는 순간 몰입이 깨진다. 관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은 여기서 길을 잃는다.
영화를 보면서 <미드소마>가 생각났다. <미드소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하는 오컬트 축제에 주인공 무리가 참가해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이다. 오컬트 집단의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죽는 장면을 보며,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미쳤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는 신념을 가진 오컬트 집단에 공포를 느낀 관객은 자연스럽게 같은 감정을 느끼는 주인공 무리에게 이입하게 된다. 다시 <비상선언>으로 돌아와 보자. 임시완을 보고 공포를 느낀 관객은 승객들에게 이입하게 된다. 그러나 승객들조차 이상한 신념을 갖고 있다. 정부 직원들과 착륙 반대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이입할 대상을 잃는다.
<미드소마>가 무서운 이유는 사람을 죽이는 오컬트 축제에 주인공 무리가 참가해 희생될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구원으로 여기는 오컬트 집단의 구성원들끼리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축제를 벌인다면 그렇게까지 무서울 리 없지 않으냐. 그러나 비상선언은 주인공 무리가 없다. 모두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재난에 대처하지만, 관객에겐 그저 오컬트 집단처럼 보인다. '비행기를 그냥 착륙시키면 되는데 저렇게 행동하는구나.'라는 생각만 든다. 승객들이 지상의 가족들에게 잘 지내라고 보내는 영상이 화면에 애잔하게 재생될 땐 웃기기까지 하다. 공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비판받는 많은 장면에 대해선 따로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런 장면들은 모두 위의 신념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잘못된 부분은 단 하나이다. 공감할 수 없는 신념을 등장인물 전체가 갖고 있다는 설정을 영화에 적용해버렸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착륙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모든 사람을 보면서 공감할 수 없었다
좁은 공간, 평면적인 인물
<미드소마> 같은 영화엔 입체적인 인물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상선언엔 입체적인 인물이 필요하다. 재난을 다룬 현실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재난 상황에서 도덕적 선을 넘나드는 인물이 있어야 영화에 몰입이 된다. 관객 대부분이 그런 선과 악을 넘나드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상선언>엔 대부분이 평면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위주로 전개하면 영화가 재미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건 위주로 전개된다. 비행기라는 좁은 공간을 설정해놓고, 인물들은 지극히 평면적으로 설정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두 재료를 섞은 것이다. 비행기에서 대화가 빠지고 사건이 중심이 된다. 그 결과는 일본 전투기의 총격, 비행기의 곡예 운전 등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평면적인 인물들이 내리는 결정에조차 관객이 공감하지 못했다. 입체적인 인물의 선택엔 관객들의 의견이 갈릴 수 있지만, 평면적인 인물의 결정에 공감이 안 되면 영화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공감되는 인물의 부재
윤석은 비행기 내에서 감염자의 격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빌런(빌런으로 묘사했으나, 상식적인 선에서 격리를 주장한다)이다. 격리를 주장하는 윤석과, 착륙을 거부하는 나머지 승객들이 대비된다. 이병헌은 "우리들은 지상의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착륙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빌런으로 묘사된 윤석이 유일하게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선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공감한 게 아니다. 현실적이라 공감한 것이다. <마더>의 김혜자가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냥 그 사람이 왜 그랬을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윤석은 유일하게 이해가 되는 행동을 내린 인물이었다.
영화에는 윤석 이외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은 배제하고 무조건 착하고 희생하는 사람들만 나온다. 너무나 선한 사람이 희생하는 건 관객이 공감하게 만들지 못한다. 선과 악 사이에서 악에 치우쳐 줄타기하던 사람이 희생을 한다면 모를까.
제작자의 의도
제작자는 인간의 이기심을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미국과 일본이 착륙을 거부한다. 초반에 격리를 주도한 윤석이 착륙을 거부하는 시위대를 보고 화내자, 수민은 "아저씨도 그랬잖아요."라고 일침을 날린다. 착륙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너희들끼리 죽어라."라는 댓글이 달린다.
이렇듯 이기적인 모습을 다루기 위해 착륙 거부당하는 장면들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런데 착륙 거부당하는 이유를 잘못 설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착륙하지 '않는' 모든 이유(영화에선, 착륙하지 '못하는' 모든 이유)가 말이 안 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비행기가 착륙하면 바이러스가 퍼진다.'라는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근데 비행기는 땅에 닿지도 못하게 하면서 처음 바이러스 걸린 시체를 접한 송강호는 회의까지 참석해..?)
착륙하지 못하는 이유를 영화 기획 단계에서 제일 마지막에 정한 것처럼, 말도 안 되게 짜 맞춰 넣은 느낌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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